Essay

미얀마 인턴 생활을 끝내며

재은초 2023. 8. 2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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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7-29에 작성했던 글입니다아
 

 23살에 생전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봤다. 제주도로 가는 한 시간짜리 비행기였다. 그리고 6개월 뒤 난생처음 여권이란 것을 만들었고 처음 해외를 갔다. 2개월짜리 필리핀 어학연수였다. 요즘은 흔하디 흔한 것이 해외여행이라고는 하지만 당시만 해도 나에게 해외여행은 큰 마음을 먹어야지만 할 수 있는 크나큰 꿈이었다. 해외에 대한 로망에 대학도 국제통상학과 (aka 무역학)로 진학했지만 결국 해외로 나가는 데까지는 그러고도 3년이나 걸렸다.

 

취업준비생이라 쓰고 백수라 읽는다

 대학을 졸업했다. 가능하다면 미루고 미루고 싶어서 2년이나 휴학을 했지만 결국 사회인이 되는 것 자체를 미룰 수는 없었다. 사람들이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면 취업준비생이라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허울 좋은 백수였다. 졸업을 하고 남들처럼 열심히 자소서를 썼고 얼마 안 되는 곳으로 면접을 보러 다녔다. 당시 토익점수 700인 내가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그 와중에도 해외인턴만 지원을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쓴 자소서가 합격하고 면접에도 합격하면서 인턴을 시작하게 되었다. 너무 쉽게 이룬 것 같다는 생각에 몽롱할 때쯤 결국 인턴이 취소되었다. 입사 전부터 교육을 핑계로 노동을 착취하던 기업의 갑질에 기업과 나를 매칭해 준 공공기관에서 해당 기업의 인턴 파견을 취소한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와중에도 이번이 아니면 안 될 거란 생각에 끝까지 간다고 고집을 부렸다. 노예라도 괜찮으니 일하고 싶다고 말했던 나. 취준생의 절박함이 나 스스로를 노예로 만들었었나 보다.

 

결국 가게 되었다 미얀마 그리고 첫 직장 생활

 결국 가려는 운명이었었나 보다. 사회 초년생의 어리숙함을 이용하려 했던 고용주의 태도에 취소되었던 미얀마 인턴. 그 뒤로 한동안은 내가 이렇게 멍청했었나 싶어 자책하던 시간들. 하지만 나는 계속 외국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나를 다독였고 계속해서 해외인턴에 지원했다. 그리고 결국은 한 공기업의 인턴으로 다시 미얀마에 가게 되었다.

 나에게는 국가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못 가 본 미얀마에 대한 미련으로 1순위를 미얀마로 선택했다. 사실 이전까지는 미얀마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었는데, 인턴 취소 이후로 꼭 가보고 만다는 오기가 생겼다. 나중에 들어보니 미얀마를 1순위로 선택한 사람이 얼마 없어서, 나는 인턴 합격과 동시에 미얀마 인턴이 확정되었다고 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특유의 미얀마 냄새가 나를 덮쳤다. 인도스러운 냄새와 생각보다 시원한 듯 습했던 양곤의 저녁 공기는 내가 낯선 나라에 왔음을 절실히 느끼게 했다. 그렇게 시작된 미얀마 생활. 처음 하는 회사생활에 모든 게 어리둥절했지만 그래도 항상 꿈꾸던 국제개발관련한 일이어서 너무 행복했다. 무언가 내가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직장 생활은 녹녹지 않았다. 모든 게 처음이었기에 간단한 기안을 쓰는 일부터 사수한테 보고하는 일까지 모든 것이 떨리고 두려웠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갓 대학을 졸업한 인턴이었기에, 회사에서도 나에게 별로 기대가 없었기에 항상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업무는 하다 보면 익숙해진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보수적이고 딱딱한 회사 분위기가 더 힘들었다. 그래도 나의 어려움을 공감해 주는 좋은 인턴 동기들과 전문가로 파견된 박사 선생님들의 응원과 지지로 잘 극복할 수 있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나는 참 인복이 좋은 것 같다. 정말 평생 감사하면서 살아야 할 일들이 참 많다.

 

만약 내가 하반신 마비를 겪게 된다면

 그렇게 인턴 생활은 어려웠지만 나름 순탄하게 진행됐다. 그리고 인턴 종료를 한 달 앞두고 동갑내기 인턴 동기랑 미얀마의 파안(Hpa-An)으로 짧은 여행을 떠났다. 파안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많이 개발된 곳은 아니지만 깨끗한 자연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자연경관이 유명하다고 하더니 정말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느낌을 많이 들었다. 험난한 산세와 정말 구술같이 맑던 호수들. 진짜 신들이 있다면 아마 이런 곳에서 살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그런지 여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참 희한했다. 약간 귀신에 홀린듯한 느낌이랄까. 그런데 재미있기만 하던 여행 마지막날 낙상사고를 당하면서 일이 꼬였다. 작은 냇가에 발을 담그려다 미끄러지면서 뒤로 넘어졌는데 허리가 계단에 부딪치면서 순간 하반신이 엄청 무겁게 느껴졌다. 너무 아파 한참을 주저앉아있는 와중에도 순간 내가 움직일 수 있나 싶어 열심히 발가락을 움직여 봤다. 하지만 정말 꿈같이 그 순간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게다가 기침이나 말을 하는 미세한 움직임에도 하반신의 온 근육들이 찢기는 고통이 느껴졌다. 결국 현지 약국에서 산 진통제를 먹고 그 몸으로 7시간의 야간버스를 타고 다시 양곤에 왔다. 제발 자고 일어나면 말끔히 나아있기를 울면서 기도했는데, 결국 다음날도 똑같은 통증에 결국 병원에 갔다.

 다행히도 뼈가 부러지거나 신경에 손상이 간 건 아니었다. 의사는 조금만 쉬면 괜찮아질 거라 이야기했지만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통증에 매일을 울었다. 진통제 없이는 잠을 잘 수가 없었고 항상 약빨이 떨어지는 새벽 4시쯤에 일어나서 또 약을 먹고 자는 삶이 반복되었다. 얼마 없는 휴가까지 쓰고 침대에서만 누워있기를 며칠. 하지만 차도는 전혀 없었고 이러다가는 정말 큰 병이 날 것 같다는 생각에 결국 태국 큰 병원으로 이송됐다. 몇 주나 지났지만 여전히 통증의 원인은 못 찾았고 결국 뇌파검사까지 받았는데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인 게 모든 게 다 정상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병원비는 300만 원이 넘어가고 결국 한국으로 돌아와 치료를 했다. 거의 한 달간을 침대에 누워만 지냈는데, 통증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이전보다 훨씬 사람다운 거동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건강함은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한 시간이었다. 인간은 진짜 연약한 존재구나. 나도 찰나의 실수로 장애를 가지거나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삶에 대한 태도가 굉장히 겸손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영원할 것만 같은 건강함은 사실 당연한 게 아니라 신이 나에게 허락해 준 것이라는 수녀님의 말씀이 문득 스쳐갔다.

 

 20대의 나는 참 모난 구석이 많은 사람이었다. 누구는 열정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나는 욕심만 많았지만 게을렀으며, 항상 내가 뭐라도 되느냐 세상을 이리저리 판단하며 살았던 것 같다. 많은 도전을 해보지 않았으니 실패도 많이 경험하지 못했고, 그랬기에 더더욱 작은 실패에도 크게 좌절하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뒤돌아보니, 특히나 아파 보고 나니, 이 모든 것이 내가 성장하고 단단해지는 과정이었음을 이제야 문득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랑 게임이랑 많이 비슷한 듯하다. 게임 속에서 캐릭터들이 퀘스트를 깨고 경험치를 쌓아 레벨 업하듯이, 인간도 눈앞에 놓인 고난과 역경을 하나씩 해치워야만 성장하는 듯. 그래서 고난과 역경이 많을수록 더 큰 사람이 된다는 진리는 항상 참인가 보다. 아마 그런 의미에서 미얀마 인턴은 나에게 또 다른 의미로 삶의 식견을 넓혀주는 경험이었다. 무사하게 살아가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느끼게 해 줬으니 말이다. 짜증 나기는 하는데 그래도 뒤돌아보니 인생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고 신기하고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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