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아홉수 기념 미래를 고민하며 쓰는 29년 인생 회고록

재은초 2023. 8. 2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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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26에 작성했던 글입니다아

 

실패한 예체능 학생

 중2병 말기였던 나는 음악을 좋아하고 잘 안다는 근자감 하나만으로 실용 음악과로 고등학교를 진학했다. 하지만 화려했던 학교 생활은 이상하게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꼭 뭔가 안 맞은 옷을 억지로 입은 듯 겉도는 학교 생활을 보냈다. 그리고 2년쯤 되었을까. 그때쯤 내가 음악으로 돈을 벌어먹고 살만큼 재능이 있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던 것 같다. 하지만 딱히 뭘 해야 할지 몰랐던 나에게 당시 담임 선생님은 창업 캠프 참여를 권유해 주셨고, 그곳에서 아이디어로 기획하고 실무 프로젝트를 만들어가는 경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경제학도 AKA 무역학과 학생

 뒤늦게 수능 공부를 시작해 국민대 국제통상학과에 진학했다. 당시만 해도 국민대라는 학교를 몰랐지만, 단지 인서울이라는 이유로 우연히 국민대 수시에 지원하게 되면서 학교에 방문했는데 그때 첫눈에 반했다. 아직도 버스에 내리자마자 느껴진 그 북악산의 상쾌한 공기와 캠퍼스의 아늑함이 생생하다. 그때 수시 면접 끝나고 한참을 벤치에 앉아서 여기 정말 너무 다니고 싶다고 다짐했었는데, 얼마나 가고 싶었는지 오죽하면 꿈까지 꿀 정도였다.

 그날 이후 간절히 합격하기를 바랐지만 역시나 국민대 수시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맨날 학교 캠퍼스를 걸어 다니는 나를 상상하며 수능 공부를 했고, 다시 정시에 지원해 합격했다. 당시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내용의 책 'Secret'이 유행하던 때였는데 정말 생각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크게 공감하게 되었다.

 대학 생활은 너무 좋았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나의 세계가 좋은 방향으로 넓어지는 것을 느꼈고 또 경제학도 너무 재밌었다. 즐기며 공부했지만 성적이 높지 않았던 건 참 큰 의문이지만, 그래도 B 학점에 행복해하던 소박한 대학생활을 보냈다.

 특히나 항상 사회 문제에 '왜'라는 질문으로 사람들을 괴롭혀오던 호기심이 많던 나에게, 사회 문제들의 원인과 영향 그리고 결과들을 일목요연하게 알려주는 경제 이론을 배우는 게 너무 신났다. 뭔가 항상 풀지 못하던 문제들의 답을 얻은 것과 같았달까. 그래서 나는 내가 대학에 와서 경제학을 공부하게 된 건 정말 신의 한 수라고 항상 생각한다.

 

2년간의 방황, 방향을 못 찾던 나

 나는 단순 무식한 편이다. 그래서 한번 결정하면 그 다음날 바로 실행할 만큼 행동력이 좋은 편인데, 20대 초반의 나는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시간만 낭비하며 살았다. 그래서 4학년이 되기 전에,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이 무서워 회피성 휴학을 했다. 항상 의무처럼 매일 가던 학교를 안 나가니 뭘 해야 할지 몰랐고, 이제 진짜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나는 뭘 하고 살아야 하나라는 걱정이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당시 개인적인 사정으로 큰 충격을 받으면서 한 6개월을 슬럼프에 빠졌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패배감에 빠졌었다.

 그렇게 6개월쯤 되었을까. 무기력하게 6개월을 보냈는데, 결국 내가 움직이지 않으니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고 계속 똑같은 고통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누가 나의 절망을 끝내주거나 나를 절망에서 꺼내 주기를 바랐는데 사실 그 절망을 끝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어차피 죽지도 않을 거면서 이렇게 살지는 말자라는 생각을 했지만 무엇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진짜 작은 것부터 시작했다. 일단 매일 집 밖을 나가기부터 시작해서 운동을 하고 자격증 공부를 하고. 그리고 그 작은 성취감들을 발판으로 국토 대장정, 대선 캠프 봉사, 내일로 여행, 교육 봉사, 해외 봉사 등에 도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저 때가 내 20대 인생을 통틀어 가장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나를 굉장히 성숙하게 만드는 계기였다. 나는 항상 문제가 생기면 정면 돌파가 아니라 회피하던 어린 사람이었는데, 20대가 되어 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부담하려니 병이 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저 때 처음으로 세상에 내가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것도 깨달으면서, 실패에 조금 더 호연해지고 여유로워진 것 같다.

 

필리핀 그리고 미얀마 국제 개발 인턴

 2년간의 방황 동안 나에게 가장 큰 성취감을 줬던 일은 '봉사활동'이었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자기 비하에 빠져있던 나에게, 봉사활동은 나도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자의식을 심어줬으니 말이다. (그래서 슬럼프와 우울감으로 힘들어하는 친구들에게 항상 봉사활동을 추천해주고는 한다!) 그러다 휴학 막바지쯤, 한 기업의 후원을 받아 2개월 동안 필리핀 앙헬레스 클락로 어학연수를 가게 되었다.

 23살 내 인생 첫 해외 여행지였던 필리핀. 23년 동안 한국 이외에는 아무 곳도 가본 적 없는 나에게, 필리핀은 엽서에서만 보던 맑은 바다 따뜻한 태양만이 있는 행복한 여행지였다. 하지만 현실은 처참히 달랐다. 하필이면 내가 지냈던 곳은 필리핀에서도 홍등가로 유명한 곳 '앙헬레스'였다.

 10대 초반의 어린 소녀가 진한 화장을 하고 뒷골목에서 늙은 남자들을 유혹하는 모습이 이상하지 않는 곳. 오토바이를 탄 도둑이 행인의 금 목걸이를 훔쳐가면 그 비싼 금 목걸이를 하고 다닌 사람이 이상하다고 하는 곳. 타이어 터지는 소리가 혹여 총소리는 아닐까 걱정하게 만드는 곳. 그리고 한밤중 여학생 숙소에서 강도들이 침입해 물건을 빼앗아가는 곳. 해외에 왔다는 설렘도 잠시였고 나는 처음 느껴보는 긴장감 속에서 2달을 지냈다.

 그곳에서 지낸 지 한 3주쯤 되었을까. 호기심에 어학원 뒷문을 나섰다가 폐허를 발견했다. 쓰레기가 산처럼 쌓인 탓에 강물은 까만색이었고 강한 악취에 어지럽고 눈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쓰레기산을 미끄럼틀 삼아 노는 아이들이 있었다. 얼마나 해맑은지 꼭 그 쓰레기 물이 세상에서 제일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알고 보니 그 지역은 빈민가 중에서도 집도 없이 살아가는 극빈층 거주지역이었는데,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너무나 비현실적인 모습에 그 순간 모든 장면이 슬로우 모션처럼 지나갔다. 그 사건이 결정적이기도 하지만 2개월 동안 본 필리핀의 불합리함이. 특히나 어린아이들의 비극적인 모습이. 나를 국제 개발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고 결국 대학교 졸업 이후에 국제 개발 인턴으로 미얀마에 가게 만들었다.

아이들이 빈곤, 범죄, 윤락의 길을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국제 개발에 대한 환상이 너무 컸던 게 문제였던 것 같다. 뭔가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바꾸겠다는 내 기대는 매너리즘에 빠진 보수적이고 수동적인 기업 문화와 비윤리적인 몇몇 직원의 태도에 산산조각이 났다. 멀리 볼 것도 없이 현지 직원을 인격적으로 모독하던 회사 직원의 태도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리고 NGO 및 여타 파견 봉사자들의 열악한 생활환경을 보면서 과연 나는 저렇게 희생하는 삶을 평생 동안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가끔은 정말 젊은이들의 희생정신을 담보로 기구만 배 불리는 게 아닌 건가 싶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선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희생정신이 이용당하는 것만 같아 화까지 났다. 너무나 존경스러운 분들이 많았는데, 우리나라 정서상 봉사자가 호위 호식하면 안 좋게 바라보는 인식 때문에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영국 워킹 홀리데이 2년

 미얀마 인턴 종료를 한 달 앞두고 다시 취업 공고를 열심히 살피다가 우연히 영국 워킹 홀리데이 소식을 접했다. 사실 영국 워킹 홀리데이 갈 돈이나 생각도 없었고, 가고 싶지도 않았는데 이전에 미얀마 인턴 때문에 포기했던 캐나다 워킹 홀리데이 생각이 나서 그냥 지원했다. (그때 선착순 들려고 엄청 열심히 연습하고 합격한 거였는데 포기해서 너무 아까웠다 ㅎㅎ)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한 장 짜리 자소서를 쓰고, 한국에 있던 10년 지기 친구한테 부탁해서 대신 서류를 제출을 했다. 그런데 워낙 경쟁률이 세다고 들어서 합격할 거란 생각은 못했다. 하지만 합격했고 끝까지 안 가기 위해서 여러 가지 변명들을 만들어 냈다.

 당시 내 나이가 26살이었는데, 이제는 그만 방황하고 직업적으로 안정감을 가지고 싶다는 갈망이 컸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세상이 요구하는 시간표에 의하면 26살의 삶이란 취직하고 안정적으로 일하다 서른 전후에 결혼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2년이라는 시간이 낭비처럼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미친 생각이었지만...  

 하지만 어렵게 받은 비자를 버리기가 아까웠다. (나는 항상 일을 저지르고 버리기 아까워서 어쩔 수 없이 움직인다...) 그래서 일단 여행 간다는 생각으로 갔다가 제대로 된 일을 못 찾으면 돌아오자는 생각으로 비자 비용으로 200만 원을 질러버렸다. 그리고 이후 6개월 인턴 월급으로 모은 300만 원이랑 대출금 300만 원을 챙겨, 3개월이라는 데드라인을 만들어 영국으로 떠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얀마가 내 인생에서 가장 멀리 떠나본 곳이었었는데 영국이라니 설렘보다는 어안이 벙벙했다. 떠나는 날 뭐가 그렇게 무섭고 서러웠는지 엄마와 헤어지면서부터 울기 시작해서 결국은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서 안에서 울다가 지쳐 잠드는 신파를 찍어댔다. 그냥 너무 무서웠다. 내가 모르는 곳에 가는 것도 그리고 내 인생을 내가 온전히 책임지는 것도.

 도착해서는 멋있는 런던을 즐길 새가 없었다. 첫 주에는 집 구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둘째 주부터는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회화 연습할 겸 한 달에 85만 원짜리 런던에서 가장 저렴한 영어 어학원 아침반을 등록해서 다녔다. 그 뒤로는 직업 찾기에 전념했는데 나는 경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오피스 직업만 찾았다.

 원래는 전공인 무역을 살려 무역회사나 포워딩 업체에 취직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영국에 있는 한국 기업에 몇 번 면접을 봤고 몇 군데에서는 합격 메시지도 받았지만 어떤 곳은 무급 인턴을, 어떤 곳은 스타벅스에서 일하는 것보다도 더 적은 월급을 제시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한국 기업의 한국인 노동 후려치기구나 싶어서 어이가 없었다.

처음에 직업도 못 구하고 돈도 없어서 맨날 집에만 있던 나.룸메이트 동생 덕분에 브라이튼에 갔다왔다. 워홀 첫 여행

 적은 돈이라도 일하면서 경력을 쌓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었을 때, 엄마가 일 시켜놓고 제 값 안 주는 거지근성 회사는 상대하지 말라며 나 대신 쌍욕을 해줬다. 사람 쓰는데 돈 몇 푼 깎아서 이속 챙기는 것이 부끄러운지도 모르는 사람들 밑에서 일하면서 인생 망치지 말라고. 그런 데서 일할 거면 한국 돌아오라고 너무 단호하게 말해 나도 결국 마음 단단히 먹고 불합리한 제안들은 다 거절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나의 가치는 나 스스로가 만드는 것 같다. 한번 불합리에 타협하면 계속 끝도 없이 타협되는 듯.)

 그래도 2개월 조금 넘었을 때 한 기업에 면접을 보았고 다행히도 합격해 출근하게 되었다. 사실 적은 월급 때문에 한번 고사했지만, 그래도 근무하시는 분들이 젊고 면접 당시 설명해 주신 사업 내용이 굉장히 흥미로웠기 때문에 월급 부분은 적당히 타협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니다 싶으면 그만둬야지 했던 것이 결국 1년 9개월로 내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꽉 채워 일하게 되었고, 내 경력적으로나 인생적으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던 계기가 되었다.

 해당 분야 경력이 없어서 많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너그럽게 많은 기회를 주셔서 여러모로 너무 감사했던 경험이 되었다. 정말 내가 인복이 많구나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던 영국 워킹홀리데이. 그리고 홀로 살면서 나도 모르던 나의 새로운 모습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어서 정말 인생적으로 큰 소득을 얻었던 것 같다.

 

2018년 한국에 돌아오고 백수인 지금

 2018년 작년 3월에 2년간의 워킹 홀리데이를 끝내고 한국에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마지막 한 달 월급을 탈탈 털어서 고등학생 때부터 버킷리스트였던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탔다. 시베리아 열차 여행은 생각보다 심심했는데, 아마 이제는 여행에 대한 환상이 사라져서 그런 것 같다. 항상 새롭고 뭔가 다를 거란 환상에 여행이 신나기만 했는데, 외국에서 지내다 보니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은 다 똑같다는 걸 느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총 7일간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

 막연히 선진국이니까 우리나라보다 낫겠지라는 생각에 선망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우리나라보다 더 보수적이고 불합리한 일들이 만연하다. 특히나 외국인으로서 받아야 하는 불합리함은 생각 이상으로 많고, 치안 불안에 걱정하고, 항상 긴장하면서 사는 삶이 약간은 고달프기도 하다.

 예전에 초, 중, 고, 대학교까지 외국에서 다니고 약사로 일하던 아는 언니가 다 포기하고 한국에서 산다고 했을 때, 다들 이상하다고 했는데 이제야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알 것 같다. 내 친구들은 국뽕이라고 놀리지만, 정말 한국은 살기 좋은 나라가 맞다. (미세먼지는 조금 심각하기는 하지만...)

 이로써, 내가 20대에 하고 싶었던 모든 것들은 정말 원도 한도 없이 다 한 것 같다. 물론 남은 건 빚과 돈도 없고 직업도 없고, 집도 차도 없지만 후회는 없다. 앞으로 다가오는 30대는 분. 명. 더 험난하겠지만, 어차피 죽지 않는 이상 피할 수 없는 것이니 그러려니 살아야지 뭐. (는 사실 우리 엄마 말. 가끔씩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데, 너무 띵언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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